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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

이제껏  살아온  나날들의  밤낮 속에서

얼마나 많은 어둠과 밝음을 거듭 보아야 했고,
또 그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마음의 양지와 음지 속을 헤매야 했던가?
한낮이 밝아 좋다 했으나 그 광명을

피하려 한 적이 더 많았고,
야밤이 어두워 싫다 했지만

그 흑암 덕분에 쉬고 자며 이제껏 버틸 수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양지가 아니라 음지 덕분에

살아 버티는 것이었다.

발행인 박인학

 

젊은이들은 양력 1월 1일 신정에 나이를 먹고, 늙은이들은 음력 1월 1일 설날에 연세를 드신다. 어떻게든 나이를 먹으려 용쓰는 철부지 아이들도 있는데 반해, 연세 드시는 게 싫어 오는 나이를 꿀꺽 하고 삼켜 먹어버렸다며 농을 던지시는 어르신도 계시다. 그러나 그 어르신네들도 오는 세월 못 막고, 가는 세월을 붙잡지도 못함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게다. 양력과 음력을 병용하며 사는 우리들로서는, 아직도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이 신년명절을 한 달 안팎으로 두 번 쇠며 한 번 더 논다는 것 말고는 그리 탐탁히 여기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해와 달을 하늘 위에 두고 사는 우리들로서, 양력과 음력의 의미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할 듯싶다.

 

일단, 음(陰)에서는 양(陽)이 보이고, 양(陽)에서는 음(陰)이 보인다. 너무 당연한 얘기이지만, 陽이 밝음은 陰이 어둡기 때문이다. 즉 상종할 수밖에 없는 양단(兩端)이 바로 陰과 陽인 것이다. 마치 날숨과 들숨처럼, 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산소를 들이마시는 것만이 절실해 보이나 더 절박한 것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것이라는 것이 생물학적 원리란다. 그래서 호흡이란 字도 ‘내쉴 호(呼)’를 먼저 하고 ‘마실 흡(吸)’을 뒤에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밤낮이란 말의 수순처럼, 흑암이 먼저 존재했고 빛이 나중에 만들어졌음은 창세(創世)의 섭리였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그 어디에 놓여 있는가? 이제껏 살아온 나날들의 밤낮 속에서 얼마나 많은 어둠과 밝음을 거듭 보아야 했고, 또 그 시간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마음의 양지와 음지 속을 헤매야 했던가? 한낮이 밝아 좋다 했으나 그 광명을 피하려 한 적이 더 많았고, 야밤이 어두워 싫다 했지만 그 흑암 덕분에 쉬고 자며 이제껏 버틸 수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양지가 아니라 음지 덕분에 살아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인간이 불을 치켜들고 밤을 밝히기 시작하더니 이젠 전기라는 것까지 만들어 자연이 하사한 야음(夜陰) 속에서 제멋대로 켜고 꺼대니, 그 천혜의 안식마저 빼앗긴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릴 적부터 음수(陰數)는 ‘-’ 양수(陽數)는 ‘+’라 배우고 자라 그런지, 음지에서 나와 음지로 돌아가는 게 인간이건만 陰의 심오한 가치는 제쳐두고 오직 陽만을 좇아 헤매는 현대인들이 자못 걱정스러울 뿐이다. 주야장천(晝夜長川)이라, 밤과 낮은 쉬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과 같이 늘 끊이지 않고 이어지건만…
디자인은 그림의 대중화 작업이다. 그리고 그림이란 선과 면 위에, 명(明)과 암(暗), 농(濃)과 담(淡), 원(遠)과 근(近), 유채색과 무채색으로 주(主)와 부(副)를 가려 유(有)와 무(無)로 채워놓은 양(陽)과 음(陰)의 조합이니, 디자인은 대립하는 이 이원(二元)의 최적화 작업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그 음양 양의(兩儀)의 조화로운 합일(合一)이 바로 태극(太極)으로, 이 두 개의 이기(二氣)가 서로 대립하고 의존하는 이상일태(二像一態)로 통합되었을 때 비로소 천지간의 만물로서 창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태극 속의 원기인 음양은 순환하고 진화하는 변화의 원리로서 존속하기에,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화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철학적 이치이다. 이에, 양극(兩極)의 융합으로 만들어지지만 상충에 의해 영구히 변모해야 하는 게 디자인이란 것이니, 정녕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오목조목, 아기자기하게 채우는 것보다, 알맞게 비우고 걸맞게 채움이 최고의 디자인 기법이다. 즉 여백의 미를 능가하는 아름다움의 비법은 없다. 陽을 부각하기 위한 陰의 절제가 제일 힘든 디자인의 조율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陽을 바라보기는 하지만 陰 속에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이 陰 속에서의 안식은 어머니 태내에서의 안면으로부터 기인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태극기게양대 설치를 놓고 보수와 진보 진영은 또 지리멸렬한 말싸움질을 주고받더니 결국은 행정협의조정위원회의 판결에 넘겨졌단다. 누가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 우선 과연 그네들 모두에게 태극기의 의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태극기는 순일무잡(純一無雜)의 한민족정신을 의미하는 백색을 바탕으로 하여, 중앙에는 양상음하(陽上陰下)의 원리에 의거해 陽인 홍색이 위, 陰인 청색이 아래로 하여 일원상(一圓相)이 된 태극이 있고, 네 귀에는 건(乾)·곤(坤)·감(坎)·이()의 사괘(四卦)가 배치되어 무궁한 순환과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이웃나라 일본의 일장기를 보면서, “우리는 어찌 이리도 어렵게 만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남들은 자아도취적 발상이라 할지 몰라도, 물론 제 나름의 의미는 있다 하겠지만 가로 세로로 몇 줄 그어놓은 국기들이나, 별이나 달, 동물이나 건물, 심지어 나뭇잎 하나를 덩그러니 그려놓은 다른 나라의 국기들보다는, 그 어느 나라 국기와 비교하더라도 더없이 오묘한 우주의 진리와 민족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태극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태극기는, 거두절미하고 나와 너의 정신적 화합이 대전제이다. 아니면, 아무리 드높이 내달아봐야 아무 의미는 없을 것이다. 퇴계 이황(李滉)은 ‘태극은 지극히 존귀한 것으로 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이며, 어떠한 것에도 명령을 받지 않는 것’이라 하셨단다. 그러나 너무 무지몽매한 잡설들만이 난무하고 있다. 그 상하 좌우할 것 없이, 어느 명(命)도 서지 않는 이 세상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단어가 이것이란다. 혼용무도(昏庸無道)라, 세상이 어지럽고, 도리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글쎄, 그건 아닐 듯하고, 쥐들이 사는 곳에 땡볕이 들어서도 안 될 성 싶다. 그러나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말만은 어김없는 이치라 여겨진다. 우리 지구를 향해 비추는 저 태양이 존재하고 그 주위를 순간의 멈춤도 없이 돌고 있는 게 우리 인간인 이상, 빛과 그림자는 아주 공평하게 번갈아가며 오고 가는 게 이 우주의 섭리인 것이다.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말이다. 지금 우리들의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빛줄기를 찾는 것이다. 다시 눈을 뜨자! 빛은 보이지 않을 뿐이지, 어디엔가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북풍한설 겨울이 제 아무리 길어봐야, 봄은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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