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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발행인 박인학

앞으로  내가  만들어낼  책은, 이제껏 만들었던 책보다 적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부터 또 30년? 자신 없다.

누군가 이어가 주길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다.

잡지는 결코 그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박인학’이란 이름 석 자도 언젠가는 목차 페이지에서 사라져,

여느 한 명의 독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혹여, 말석의 기자 자리라도 주어진다면 더없이 감지덕지!

박인학│발행인


월간인테리어 창간 30주년이다… 서른 살.

서른을 ‘이립(而立)’이라 한단다.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 즉 스스로 서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논어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자립이라… 두 다리 있으니 설 수 있다는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일을 향해 걸어 나갈 수 있는 근력과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는 방향이 관건이다. 더욱이 도덕 위에 서라 하셨다니, 옳고 그름 따위의 시시비비에 휩싸이지 말고 참된 도리를 바르게 지키라는 뜻이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이 흐려지지 않을 나이, 사십 불혹(不惑)’을 향해 정진해야, ‘하늘의 명을 알게 되는 나이, 오십 지천명(知天命)’에 이를 수 있는 시간이다. 한 달 한 달도 버거웠는데, 좀 더 긴 날들을 내다봐야 하는 시점인 건 분명하다.


대통령이고자 했다. 대통(大統)하는 자가 아니라, 대통(代通)하는 자. 거창한 통치의 주도자가 아닌, 대신해서 소통케 하는 매개체의 역할이 바로 나의 중한 소임이었다. 그것만이 바로 잡지발행인에게 주어진 의무이자 권리였다. 그 귀한 책무와 직권을 나의 천직이라 여기고 이에 감사하며, 지난 삼십년의 생을 살아왔다.


어찌 보면 목적도 없는 아니 목표도 세울 수 없는 과업이었다. 왜냐하면 잡지발행이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어 전달하는 중간 역할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해주기도 했다. “책에 내주어서 감사합니다.” 난 항상 정색을 하고 답했다. “책에 실을 것을 주셔서 감사하지요.” 결코 겸손한 척하는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발행인이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INTERIORS 월간인테리어]란 제호를 표지에 새긴 하얀 종이뭉치뿐이다. 지난 30년의 360권 책들을 매달 채워주신 이는 바로 독자이자 기고자인 우리의 디자이너들이었다. 진정 고개 숙여 감사할 뿐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Thank You!” “谢谢”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1966년 김수근 님(現 이상림)이 창간한 <공간>이란 건축 잡지, 1976년 이종호 님(現 이영혜)이 창간한 <디자인>이란 종합디자인 잡지, 그리고 이젠 폐간되었지만 1977년 문신규 님이 창간하여 건축부터 디자인까지 다루던 격월간 <꾸밈>이란 잡지가 있던 상황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공모전에 응모하려 해도, ‘국전(國展)’의 건축 분야에 곁다리 끼어 출품하는 게 고작인 서자(庶子)살이를 하던 나날이었다. 전공학과 명칭도 ‘건축미술’, ‘장식미술’ 아니면, 한 다리 건너 ‘생활미술’, ‘응용미술’, ‘산업미술’ 등의 유관학과에 학과목 정도로만 개설되어 있던 게 실상이었다. “글쎄, 잡지 이름을 ‘인테리어’라 하면 팔릴까요?” 사실이었다. ‘인테리어디자인’이란 낱말은 ‘인테리(Intelligentsia)’들이나 쓰는 말이었지, 많은 이들은 ‘실내장치’ 또는 ‘실내장식’이라고나 해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런대로 알아듣던 시절이었다.


1986년 10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 아니, 아무것도 몰라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지금만큼만 잡지에 대해서 알았더라도, 과연 그리 시작할 용기가 났었을 지 자신이 없다.

‘벤처’라는 단어도, ‘스타트업’이란 용어도 없던 시절이었다. ‘건축미술’이란 간판을 단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운 좋게도 바로 대학강의를 맡게 되어, 이 바닥에서 겨우 아장거리기 시작했던 청춘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대학 2학년 시절부터 ‘예가(藝家)’라는 회사를 여의도에 차려 정말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며 일들을 배웠다. 말이 좋아 인테리어디자인이지, 어쩌다 들어오는 눈먼 싸구려 공사일 말고는, 하나 같이 동네학원의 매직글씨 차트 일, 연극 무대장치와 포스터 제작에 덤으로 풀팅(담장이나 전봇대에 포스터 붙이기)하는 일부터, 나름은 수출도 하는 회사라지만 거의 사장 한 명에 직원 두셋인 구멍가게의 광고인쇄 찌라시 일까지,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야만 소위 ‘프로젝트’를 딸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막일과 잡일이 인테리어디자인을 인쇄물로 만들어내는 잡지 일을 터득하게 된 밑거름이 된 것은 분명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닥공(닥치고 공격)’ 그 자체였다. 여하튼 경력자 한 명 없는 회사를 차려놓고, 소위 창간호를 내놓았다.


“‘가인’의 이름으로 ‘인테리어’란 책은 내놓았지만 그 속을 다 채우진 못했습니다. (중략) 지나간 한 계절 동안 우리는 하나의 그릇을 빚으려고 도공이 되었습니다. 좋은 흙을 찾아 먼 길을 떠나기도 했고, 그 흙을 입에 넣고 씹어 맛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팔을 걷어붙이고, 작은 기포가 생길 새라 반죽을 더 하고, 조심스레 물레를 차며 그 모양을 만들어 갔습니다. 허나 만들어진 모양은 너무 초라했고, 우리의 생각에조차 미치지 못했습니다. 다시 부수고 만들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검게 그을린 얼굴로 마지막 기도를 드리며 불을 붙였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던 때도 있었지만, 그 불은 지켜주겠다며 막아 서 주는 고마운 이들도 있었습니다. 초벌구이를 하고, 유약을 바르고 또 다시 가마에 넣었습니다. 마침내 작은 그릇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그릇에 담을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중략) 우리 가인은 ‘내일’을 사랑합니다.”


꼭 30년 전인, 1986년 10월에 썼던 ‘창간사’이다. 그리고 오늘, 그 긴 내일들 중의 어느 하루가 되었다. 이립(而立)도 안 된 한 젊은이의 보잘 것 없는 글이었지만, 그 심경만은 지금도 똑같은 마음이다. 앞으로 내가 만들어낼 책은, 이제껏 만들었던 책보다 적을 것은 분명하다. 지금부터 또 30년? 자신 없다. 누군가 이어가 주길 간절히 바라는 심정이다. 잡지는 결코 그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박인학’이란 이름 석 자도 언젠가는 목차 페이지에서 사라져, 여느 한 명의 독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혹여, 말석의 기자 자리라도 주어진다면 더없이 감지덕지!


“나에게 돈이 좀 생기면 나는 책을 산다. 그리고 남은 돈이 있으면 빵과 옷을 산다.” 르네상스의 또 다른 하나의 지적(知的) 흐름을 만들어낸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의 말이다. 그러나 작금의 세상에는 옷 사고, 커피 사고, 빵 사는 모습만이 남았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 해봐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만 들을 세상이지만, 누런색 200자 갱지 원고지, 파란 방안눈금이 그어진 빳빳한 대지(臺紙), 신줏단지같이 모시던 핫셀블라드 카메라, 옆도 안 보고 사진식자만 치던 을지로 아가씨, 낮밤 없이 필름을 주고받던 충무로 원색분해집 총각, 항상 동동거리는 다그침을 당하기만 했던 출력집 사장님…

이제는 모두가 아스라이 사라진 추억 속의 잔상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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