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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우리 속에 갇힌 우리

 

‘우리’라는 이름이 횡횡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 현혹되지 말자.
우리를 빙자하지도 말자.

우리라며 강요하지도 말자.

우리를 남용하지도 말자.

우리에 구속되지도 말자.
‘나’들이 모인 것이 ‘우리’이다.

발행인 박인학

 

 

우리 인간 개개인들이 더없이 높은 가치가 있다 여기는 그 무소불위의 힘들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체력부터 능력, 학력, 재력, 권력,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까지, 그 역량들은 진정한 나의 힘일까? 특히 절체절명이라 인정하는 인간 내면의 고정관념들 중에는, 자기 관념이 아닌 사회적 통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더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의 머리와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그 많은 생각들이 정녕 내 것인가 하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 웃어넘길 수만은 없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듣고서…

2007년 1월의 어느 겨울날,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친 채 야구모자를 눌러 쓴 한 젊은이가 워싱턴 지하철역에서 바이올린을 꺼냈다. 그는 지폐 몇 장과 동전 몇 개가 든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놓고 43분 동안 클래식음악 6곡을 연주했고, 그 사이 1,070명의 행인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갔다. 그는, 최고의 사랑을 받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Joshua David Bell)이었다. 게다가 그가 연주한 바이올린은 350만 달러짜리의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이것은 대중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위대한 예술에 대한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자가 기획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 공연에 지하철역은 아수라장이 될 거라 여겼으나, 길을 가다가 멈춰 조슈아의 연주를 감상한 사람은 고작 7명뿐이었고, 기부 받은 돈은 32달러 17센트에 불과했다.그래, 우리는 조슈아 벨의 음악 자체보다는 그의 유명세에만 고개를 조아리고 살았던 것이다.

디자인, 특히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해가 바뀔 때마다 트렌드니 스타일이니 패러다임이니 하며 별의별 키워드들이 머리를 치켜든다. 올해의 유행색은 뭐가 될 것이고, 바지통은 어찌 될 것이며,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은 어떻게 달라질지… 런웨이 모델들의 비주얼을 따라, 홈쇼핑채널의 쇼호스트들로부터 시장의 옷가게점원까지 모두가 나서 트렌드세터(Trend setter)임을 자처한다. 또 온갖 세미나에서는 빼어난 용모의 선남선녀들이 갖가지 전문용어들을 구사하며, 매우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이는 핫한 신조어들을 마치 계시된 예정론인양 만천하에 쏟아 놓는다. 일기예보야 리모컨만 돌리면 매 시간 무상 제공되지만 이 트렌드 발표회들의 입장료는 수십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이 자리에서 뒤처지면 뒷방신세가 될까 두려워 점잖은 체면에 몰카질까지 자행하며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의 대열에 끼어든다.

어찌 보면, 줏대 없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우리의 모습이 소위 정보화시대라 통칭되는 근자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속성인 듯싶다. 즉 생각할 틈도 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에 채여 이리저리 휩싸여 다니는 게 요즘의 세태이니, 세상은 눈뜬장님이 이끌고 반벙어리가 외쳐대는 형국이다. 여론조사에 절절매고, 다수결에 슬슬 기고, 빅데이터라면 뭔지도 모르면서 머리부터 조아리는 게, 우리네 타성이 되고 말았다. 이러니 언뜻 보면 대단해 보이는 일심동체의 집단 같지만, 실상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앞사람 뒤통수만 따르는 무리들도 적잖아 보인다.

三思一言 三思一行 삼사일언 삼사일행. 공자가 말씀하시길, ‘한 마디 말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고, 한 번 행동하기 전에 세 번을 생각하라’ 하였단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말하고 행하기 전에, 보고 듣는 것부터 엄히 가리고 중히 고르는 게 필요하다. 너무 헛한 잡소리와 너무 난한 볼거리만이, 천지사방에 난무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런 말들이 있다. “일류 인간은 일류 인간을 고용하지만, 이류 인간은 삼류 인간을 고용한다.” 즉, 삼류는 사류, 사류는 오류를 모을 테니, 일류들은 따로 있고 결국 우민(愚民)들은 점점 하향평준화가 되고 있다는 게다. 또 “대중은 최고의 기술이 아니라, 최고로 홍보된 기술을 수용한다.” 즉, 점점 더 멍청해진 그 민초들은 시끌벅적한 함성을 따라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만다는 것이다. 하기야 잘났다는 자들치고 떼거지로 몰려다는 걸 본 적 없고, 북새통 떠는 데에서 진정으로 잘난 자를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친(親)’이니 ‘반(反)’이니 ‘범(汎)’이니 ‘비(非)’니 심지어는 “뼛속까지!”라며 ‘진(眞)’이란 접두사를 자부하는 족속들이, 이 나라 정치판에서 공공연하게 나돌아 다닌다. 내 자신의 존재보다 누군가와의 밀월관계가 나의 정치적 위상이라는 게다. 한심한 아바타들이다. 소위 ‘국민의 대표’라며 목청 높이는 자들이, 결국은 누구의 끄나풀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다.

우리에게는 어찌 보면 더 없이 멋들어져 보이는 ‘우리’라는 단어가 있다. 적지 않은 경우에 ‘나’보다는 ‘우리’의 의식이나 판단을 우선시하며, 나를 낮추고 감추는 것이 우리들의 미덕이라 여기고 아름다운 미풍양속이라 믿으며 살았지만, 달리 보면 매우 무책임한 위선적 행동거지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우리 우선’의 사고방식은 절대다수인 피지배계층을 ‘대중’이란 단어로 포장해 한꺼번에 우민화(愚民化)하는 책략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유순한 ‘우리’를 갑갑한 ‘우리’ 속에 가두는 모략의 술수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우리’라는 이름이 횡횡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 현혹되지 말자. 우리를 빙자하지도 말자. 우리라며 강요하지도 말자. 우리를 남용하지도 말자. 우리에 구속되지도 말자.
‘나’들이 모인 것이 ‘우리’이다. ‘초록은 동색’이라며 무조건 획일화되는 것보다는, 다 다른 색들이 모여 새로운 색을 발할 때에 진정한 발전이 시작된다. 흑과 백, 청과 홍이 어우러진 우리의 태극기처럼, 제각각의 색 그대로를 드러낸 채 함께 가 보자. 절대독재자가 압제하는 나라가 아닌 이상, 획일화의 끝은 결국 양극화이다. 모리배처럼 하나로 몰아대는 저 잡배들에게 속지 말고, 나와 너의 진심을 터놓고 나누어 보자. 내가 먼저 들어 주며 함께 얘기해  보자. 듣고 보니, “아니, 내 얘기가 네 얘기였네!” 했던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제발 허깨비 같은 그 ‘우리’라는 불특정 대명사에 속아 넘어가지는 말자. 우리의 가치는 확고한 너와 분명한 내가 존재할 때에만 모두를 위한 공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 세계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의 힘은 똑똑한 대한국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 되어 앞만 보고 가야할 때도 있지만, 동그랗게 모여 앉아 서로를 둘러봐야 할 때도 필요하다. 이상적인 우리의 모습은 복제된 동종만의 집결이 아닌, 상이한 이형들의 공조가 허용되어야 한다. 이구동성 일심동체의 차원에서 각양각색 동상이몽의 단계로 가며 이 서로의 다름들이 조화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선진의 국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들을 귀담아듣고 행동하는, 진정으로 올곧은 지도자가 필요한 오늘이다.
비가 온 뒤라야 땅은 굳는다. 잘 될 게다. 골백번 죽었다 살아난, 나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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