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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右도 左도 아닌, 上의 大한민국!

없음

선택이 권력자들의 독점권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선택이란 과정보다 외롭고 어려운 책무도 없다.

대개의 선택은 흑과 백처럼 극명한 것 중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짙고 옅은 회색들 중에서의 취택이거나, 

빨강 노랑 파랑처럼 분위기에 따라 기호가 순간순간 달라지는

매우 변덕스러운 상황 하에서의 택일이다.


박인학│발행인


여하튼, 끝났다. 작년 여름부터 불거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래, 지난 반년 이상을 ‘대통령’ 뉴스만 보고 들으며 산 꼴이다. 이겼다며 널뛰는 이도 있을 테고, 졌다며 땅을 치는 이도 있을 게다. 선거란 것도 그렇듯이 소위 다수결이 대의민주주의사회의 대원칙이라는데, 다수는 다수이되 총 유권자 42,479,710명 중 77.2%인 32,807,908명이 투표했고 41.1%인 13,423,800명의 선택으로 승자가 되었으니, 87년 직선제개헌 이후 2위 후보와의 역대최고 표차는 기록했으나 결국 전체 국민 31.6%의 뜻으로 이겼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이가 좋아 찍은 게 아니라 저이가 싫어 찍은 자들도 적지 않다 하니, 열 손가락 중 한두 손가락 덕분에 그 막중한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이러니 그 자리를 두고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하늘이 내린다’고들 하는가 보다. 지겹도록 우(右)니 좌(左)니 다투더니만, 좌우지간 승패는 가려졌다.


도대체, 좋다는 건 무엇이고 싫다는 건 또 무엇인가? 좋다는 것은 덜 싫은 것이고, 싫다는 것은 덜 좋은 것인가? 호불호(好不好)는 고사하고 자신의 의중조차도 모른다는 게 현대인들이다. 그래서 너나없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바로, “~같아요.” 아니면 “~알겠습니다.”인 듯싶다. 제 생각에 대한 확신도 없을 뿐 아니라, 하겠다는 긍정도 말겠다는 부정도 아닌, 할지 안 할는지는 모르더라도 뭔 말인지는 이해한단 말로 들린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했던 옛 선인들의 기개는 오간 데 없고, 잔머리만 굴리며 눈치코치만 살피는 게 오늘날의 처세술이다. 확실하게 좋고 싫은 것도 없이, 양다리를 걸친 채 결국은 ‘짬짜면’을 시키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다. 바로 이것을 두고 ‘중도(中道)’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이건 그저 슈퍼마켓 매대에서 ‘1+1’을 향해 손을 뻗는 우유부단한 탐심 정도일지도.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성서의 구약시대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인 게다.


물론 하루가 다른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초지일관(初志一貫)하기만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조변석개(朝變夕改)하여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것이 급변하는 현세를 사는 대처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맺고 끊는 것만은 분명해야 한다.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만 풀고 살아와서 그런지, 보기항목이 없는 주관식 서답문제 앞에서는 답안을 못 내놓고 뒤통수만 긁적인다. 말로는 “좌고우면(左顧右眄) 않겠다!”며 결연한 확고부동의 결의를 천명하더니만, 결국은 절에 가도 젓갈을 얻어먹을 만한 수준의 눈치작전 일색이 민관(民官) 산학(産學) 불문의 일심동체이다.

발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의 <불확실성의 시대 The Age of Uncertainty, 1977> 속을 사는 듯했는데, 올해는 미국 경제학자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버클리대 교수가 지적한 ‘초(超)불확실성(The Age of Hyper-Uncertainty)’의 징후가 세계 곳곳에서 입증되고 있다. 두루뭉술한 어중간들이 어영부영하며 흐느적거리는 오늘이다.


현대 디자인의 가장 큰 트렌드 중 하나도 가변성(Changeability)이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생활의 패턴은 갈수록 단순 획일화됨에 반해, 사회체제의 구조는 나날이 급속도로 변화 발전하는 양극단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 신세기형 가변 신드롬이 현대 과학기술의 혁신만큼 확연하게 변혁하지는 않는다. 즉 과거의 변화가 변증법적인 정반합(正反合) 스타일의 순간적 혁명이었다면, 근자의 변화는 옅고 엷은 치장만 가감하는 매우 미미한 대동소이(大同小異) 이미지의 지속적 전환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이제까지 축적된 경험에 자족하는 느긋함(Easy-going)과 과도한 위험을 피하려는 나약함(Risk-averse)이 이미 뼛속 깊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특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일시촉발이 아닌 수시다발적인 문화놀이를 향유하려는 속성이 이 시대의 대세이다.


인생은 선택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언뜻은 선택이 권력자들의 독점권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선택이란 과정보다 외롭고 어려운 책무도 없다. 대개의 선택은 흑과 백처럼 극명한 것 중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짙고 옅은 회색들 중에서의 취택이거나, 빨강 노랑 파랑처럼 분위기에 따라 기호가 순간순간 달라지는 매우 변덕스러운 상황 하에서의 택일이다. 막상 정하자니, 언뜻 눈이 먼저 가지만 너무 많이 겪어봤기에 권태가 느껴지기도 하고, 쉽게 손이 안 가지만 왠지 한번 저질러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좋아했던 것이었기에 싫고, 남들이 싫어하기에 좋은, 들쑥날쑥한 오리무중의 사고방식일 때가 많은 게 이 과잉시대 속에서의 현상이다.


오죽하면 ‘잡(雜)테리어’란 소리를 들을까? 인테리어디자이너처럼 어떤 때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또 어떤 땐 순간적으로 크고 작은 판단과 결정을 해내며 살아가야 하는 직업인도 없을 듯싶다. 하지만 그 결정을 위한 원칙은 명료하다.

우선 여건과 조건에 주목하자. 주변 환경과 건축 상황 그리고 고객의 재정 정도 등 현실적인 자료 분석이 우선되어야 한다. 다음은 사용자를 중시하자. 당장 돈 주는 클라이언트의 의중에만 매달리지 말고 그 클라이언트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실사용자들을 철저히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적 역량과 실험적 창의를 적절히 조화하자. 물론 디자이너를 찾아온 클라이언트는 이제까지 내보인 프로젝트들을 믿고 왔겠지만, 그 과거들에 오늘을 잘 버무렸을 때에 내일이 만들어진다.

‘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 이르는 지름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인들로부터 내려오는 지혜의 말을 통해 우리의 다친 마음을 치유해주는 안내서   <파도에 맞서야 바다의 깊이를 안다>라는 책 속의 한 구절이다. 성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없고, 하나씩 계단을 밟고 올라야 다다른단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온 세상이 모두 다 양극화된 것처럼 시끌벅적한데,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껍데기에 있는 몇몇 가지만 서로 다를 뿐 한두 겹만 걷어내고 보면 모두가 매일반의 한통속임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극단화로 인한 수혜자들끼리 모여 몽매한 우리 대중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양극의 코스프레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좋니? 아빠가 좋니?”를 물으며 결국은 순진무구한 아이를 울게 만드는 약삭빠른 모리배들처럼.

바다를 생각하면 넘실대는 파도부터 떠오르지만, 제 아무리 드높은 파도라 해봐야 수만리 깊은 심해의 적막과는 감히 비견할 수조차 없는 지극히 작은 미동일 뿐이다. 집채만 한 파도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의 동쪽에 있는 깊이 11,000m의 마리아나 해구(Mariana Trench)는 세계 최고봉인 8,848m의 에베레스트도 잠기게 만드는 무서운 깊이란다. “침묵은 경멸을 나타내는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남긴 말이다. 일파만파도 지났으니, 이제 그만 입을 다물자.

“나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그 위에 있다.” 

‘위대한 프랑스’를 낳은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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