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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물 좋은 디자이너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우리 앞에 닥친 오늘의 상황이 웅덩이 정도가 아닌

어둡고 깊은 흙구덩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채워야만 나아갈 수 있는 게 물이 보여주고 있는 이치라니,
한 방울 두 방울씩이라도 더해서 한 자 아니 한 치라도 메우며 살아보자.

 

 

발행인│박인학

 

 

“물은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물이 다 물이지… 뭔 소리?’ 삼십여 년 전 처음으로 외국에 나갔을 때 겪었던 금시초문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직도 식당에 들어가 앉으면, ‘물은 SELF’라는 각박한 명령문이 없는 경우에는 메뉴판과 함께 물을 건네는 것이 우리네의 일상이다. 물론 옛날처럼 연탄난로 위에 놓인 보리차 주전자를 들고 오는 온온한 풍경이 사라진 것은 이미 고릿적이지만, 플라스틱 생수병에 든 물 정도를 갖다 권하는 것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미풍이다.
“넌, 내가 물로 보이니?” 하기야 물만을 판다는 ‘워터바’나 ‘물카페’ 같은 도심 속 오아시스도 있다 하니, 이제 물의 위상은 어제의 그 모습은 아닌 듯싶다. 마시는 물도 노는 물도 다른 사람들이 계신 오늘이다.

대동강물 팔아먹었다는 우리나라 희대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 그러나 그는 한낱 모리배가 아닌 미래의 산업을 예측한 선견지명의 벤처창업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땅에 처음으로 들어온 유가(有價)의 물은 1976년에 ‘다이아몬드 샘물’이라는 미군부대 군납용 생수였다. 물론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이 있어, 위반한 자는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의 중형에 처해지는 시절이었던 지라 일반대중들은 범접할 수도 없는 품목이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외국인들이 우리의 수돗물을 꺼릴 수 있다는 연유로 일시적 판매가 허용되었던 것이 우리가 물을 사먹게 된 시발점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나며 다시 판매금지가 되었으나 이에 반발한 업자들이 제기한 1994년의 위헌법률심판소송 끝에 다시 해금(解禁)이 된 게 물장사였다. 이제, 20여 년이 지난 국내 물시장의 규모는 70여 업체 100여 개 이상의 브랜드가 연평균 10%대의 성장을 지속하며 2016년 8천억 원을 돌파하여 이제 곧 1조원시장을 목전에 둔 산업이라니, 가히 ‘물로 볼 물’이 아닌 세상이 되었다.

‘물불 안 가린다’는 말을 보면 물과 불이 동급으로 보일지 몰라도, 수화상극(水火相剋) 중 물의 위력은 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막강하다. 정수기에서 냉온수에 얼음까지 뽑아먹는 우리 같은 도시사람은 절감하기 어렵겠지만, 길고 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을 바라만보고 있는 농부에게는 물이 바로 생명이다. 더욱이 ‘21세기 세계물위원회’는 현재 약 30억 명의 인구가 위생급수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매일 5천 명 이상의 어린이가 더러운 물에 인한 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추산했고, 이즈마엘 세라젤딘 세계수자원위원회 회장은 “21세기 전쟁은 물 때문에 일어난다.”고 예견했으며, 이미 세계 지도자들은 인류가 처한 가장 큰 갈등은 물부족이라 진단하고 있다.

자연의 물은 우리 몸의 땀과 침 그리고 피를 모두 다 합친 것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은 대개 하루에 땀을 600∼700㎖ 정도 흘린다지만 운동을 할 때에는 10ℓ까지도 분비하며, 그 땀이 인간 건강의 바로미터인 체온을 조절해 준다. 또 침은 음식물을 부드럽게 하여 소화에 도움을 주며, 입안의 감염을 막아주는 성분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혀 표면의 맛봉오리를 세척하여 계속 새로운 맛들을 느끼게 한다니 만일 침이 없어 산해진미가 한 가지 맛이라면 이 멋도 맛도 없는 한 세상을 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그리고 물보다 진하다는 우리의 피는 두 말이 필요 없는 인간 생명의 근원이다.
또 인간의 몸이 뼈와 살로만 구성된 것 같지만 실은 70%가 물이다. 뇌의 85%, 혈액의 82%, 근육의 75%가 물이고, 심지어 뼈의 25%도 물인지라, 체내 총 수분의 20%만 부족해도 사망에 이르고 만단다. 즉 물은 우리 인간과 지구의 동식물은 물론 우주 삼라만상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척도이기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섬과 불가한 무인도의 결정 조건도 이 물이 기준이고 광대한 우주에서의 생명 존재도 물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단다.

올해도 이 한반도의 남북한 할 것 없이, 반년동안은 가물어서 물타령, 비가 좀 오나 싶더니 물난리, 위아래 할 것 없이 오나가나 생고생이 많았다. 강우유출량을 인구수로 나누는 1인당 물 사용가능량이 1000㎥ 미만은 물기근국가, 1000~1700㎥은 물부족국가, 1700㎥ 이상은 물풍요국가로 분류한다는데, 연간 1인당 물소비량 15만ℓ로 OECD 국가 중 물소비량 1위인 우리나라는 이미 물부족국가에 속해 있지만 2025년에는 1199~1327㎥로 심각한 상태에 이를 것이라 예측된단다. 더욱이 우리의 연평균 강수량은 세계평균보다 1.4배 많지만, 국토의 70% 정도가 급경사지이고 강수량 중 50∼60%가 여름철에 집중됨으로써 많은 양의 강수가 바다로 흘러가기에 물의 저류마저 어려운 게 실상이란다. 물 쓰듯 써댈 물이 아닌 듯싶다.

물은 ‘무(無)’의 상징이다. 무색(無色) 무취(無臭) 무미(無味)이며, 일단 액체이지만, 고체의 얼음이기도 기체의 수증기이기도 한 무아(無我)의 존재이다. 만일 물이 영롱한 원색을 발하며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달콤한 꿀맛이라면…, 아~ 상상만 해도 끔찍할 것 같다. 가상다반(家常茶飯) 중의 밥맛처럼 드러나지는 않으나 필요한 존재로 있는 이타(利他)적 박애(博愛)가 바로 물이며, 이것이 바로 모든 디자이너들이 품어야만 하는 마음가짐이다.

수유칠덕(水有七德)이라, 인간수양의 근본을 물이 가진 일곱 가지 덕목에서 찾아야 한다는 노자(老子)의 가르침이다.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겸손, 작고 값싼 일도 마다하지 않는 디자이너.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지혜, 타협하며 답을 찾아내는 디자이너.
더러운 물도 받아주는 포용력, 힘든 일도 도맡아 하는 디자이너.
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융통성, 형편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디자이너.
바위도 뚫는 인내, 어려운 역경이라도 견뎌 나가는 디자이너.
폭포처럼 떨어지는 용기, 자신 있게 시도해 보고자 하는 디자이너.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대의, 먼 날을 바라보며 사는 디자이너.
상선약수(上善若水)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하였으니, 그리 살아 보자.

맹자(孟子) 왈,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유수지위물야 부영과불행,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우리 앞에 닥친 오늘의 상황이 웅덩이 정도가 아닌 어둡고 깊은 흙구덩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채워야만 나아갈 수 있는 게 물이 보여주고 있는 이치라니, 한 방울 두 방울씩이라도 더해서 한 자 아니 한 치라도 메우며 살아보자.

다시 흘러야 썩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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