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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걸림돌과 디딤돌

 허구한 날 설계경기와 입찰경쟁까지 겪느라

이 꼴 이 모양이 된 줄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붉은 핏발이 가득한 눈빛과 심줄을 세워

움켜진 주먹으로는 Soft와 Smart가 대세라는

이 21세기에서 쌈박질해 볼 상대조차 찾을 수 없을 게다.
길을 걷다가 돌을 보면, 약자는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디딤돌이라고 한단다.

아옹다옹 하지 말고 알콩달콩 함께 살자.

발행인│박인학

 

봄의 전령 경칩(驚蟄)은 24절기 중 세 번째 절기로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시기란다. 이 무렵에는 첫 번째 천둥이 치고 그 소리를 들은 벌레들이 땅에서 기어 나온다 여겼고, 유교의 오경(五經)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월령(月令)’편에는 만물이 생동하는 시기이므로 ‘식물의 싹을 보살피고 어린 동물을 돌보며 고아들을 보살피라’ 이르고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봄을 ‘Spring’이라 하니, 그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기만을 기대하는 계절로 보는 듯하나, 이젠 동서양 사시사철 할 것 없이 모두 다 앞 다투어 뛰어오르는 도약(跳躍) 정도로 만족치 못하고 한 순간에 젖히고 날아오르는 비약(飛躍)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상이 되었다. 더욱이 버러지 같은 미물이나 홀로서기에 버거운 이웃들을 어루만져 주려는 이는 정녕 찾아보기조차 힘들고 그저 밤낮없이 티격태격만 해대는 세태가 되고 말았다.

먹고 살기에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 이기지만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만 박수칠 정도의 언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이 다섯 가지를 ‘행복의 조건’이라 했단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서양의 2천 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말과 시인 에머슨의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다.”란 평을 들을 만한 그였다.
공자에게 제자 자공이 물었다. “스승님, 자장과 자하 가운데 누가 낫습니까?” 자장과 자하는 둘 다 공자의 제자였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지.” 이에 자공이 다시 물었다 “그럼 자장이 낫습니까?” 이에 공자가 답했다.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다를 바가 없다.” <논어>에 나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에 대한 고사(故事)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 ‘중용(中庸)’을 강조한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훗날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말하기를 “천하에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이 있었건만, 생시에 아무리 영화로웠던들 죽으면 다 끝이었다. 오직 공자만은 포의(布衣)로 죽었으나 대대로 전해오면서 학자들의 종주(宗主)로 숭앙되고 있다.”라 하였단다.

요즈음 내가 입에 달고 다니는 한 마디 ‘성공이 아닌 행복을 위해 살자’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잔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성공한 자 중에 불행한 자는 많지만, 행복한 자는 마냥 행복하기 때문이다. 행복의 크기는 ‘가진 것÷원하는 것’만큼이라니, 오늘에 감사하며 과욕을 버리는 것만이 큰 행복을 갖는 비결인 셈이다.

위기십결(圍棋十訣). 중국 북송시대의 사대부들에게 추앙받던 기객(棋客) 반신수(潘愼修)가 태종에게 헌상한 바둑을 위한 격언이지만, 인생살이에서도 새겨보아야 할 만한 가르침이 담겨 있는 듯하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이기려고 욕심을 내서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입계의완(入界誼緩), 상대의 세력권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라.
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를 공격할 때에는 나를 먼저 돌아보라.
기자쟁선(棄子爭先), 다소 손실을 본다 하더라도 선수를 빼앗기지 말라.
사소취대(捨小取大), 눈앞의 작은 이익을 탐하지 말고 넓게 보고 큰 것을 차지하라.
봉위수기(逢危須棄), 위기 시에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신물경속(愼勿輕速), 경솔치 말고 항상 신중을 기하라.
동수상응(動須相應), 상대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멈추면 같이 멈춰라.
피강자보(彼强自保), 상대의 세력이 거셀 경우에는 우선 나의 안전을 도모하라.
세고취화(勢孤取和), 접전의 경우 내 형세가 열악하면 싸우지 말고 화평을 도모하라.
이기고 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볼 줄도 아는 좌관성패(坐觀成敗)까지는 못 이르고 너무 승기(勝氣)에만 급급한 속내가 드러나는 것 같아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동서고금 불문하고 이 속성이 우리 인간들의 심성인 것만은 자명하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했다.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이기에 그들이 쓴 역사서는 역사를 지극히 당대 본인의 시대에 관점을 두고 그들만이 생각을 메시지로 전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기에 큰 족적을 남긴 역사학자이긴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 말한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1889년에 태어나 식민제국시대와 1차와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양극의 이데올로기시대 속을 살다 1975년에 떠나신 고인일 뿐이다. 물론 그 도전과 응전의 소용돌이가 멈춘 것은 아니지만, 이젠 인간끼리의 다툼으로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21세기는 대결(對)의 시대가 아니라 대신(代)의 시대이다. 혼자의 힘으로 싸워 홀로 독식하기보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함께 나누며 자타의 능사를 공유하는 시대이다. 어찌 보면 이기(利己)를 위한 자기개발보다는 이타(利他)를 위한 상호소통이 나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 실익으로 돌아오는 세상이다. 또 더 나아가 우리의 대결 대상은 인간만이 아닌, 인공의 과학과 기술이 낳은 최첨단 신문명의 이기(利器)들이란 게 현실이다. 이에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자아와 사물이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실현만이 오늘을 이겨나갈 방도인 것이다.

디자인을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의 융합이라 하면서도, 우리 디자이너들은 적지 아니 문예에만 치우쳐 있다. 인문적 감성으로 낳은 자생적 창의만이 디자인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란 수구적 사고가, 새로운 디지털과 융합적 수용을 배척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다리 건너 있는 인문철학은 높이 보면서 과학기술의 결과물들에 대해서는 기본적 식견조차 태부족한 게 우리 디자인계가 안고 있는 실상이다. 꺼떡하면 ‘무(無)에서 나은 유(有)’를 운운하며 나만의 독보적인 고유 디자인이라 떠버릴 뿐, 너와 나 우리가 함께 낳은 디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타적 습성이 현대 디자이너들의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이다. 즉 어찌 보면 그 어떤 분야보다 적폐의 응어리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눈앞이요, 발밑인 듯하다.

싸우지 말자. 허구한 날 설계경기와 입찰경쟁까지 겪느라 이 꼴 이 모양이 된 줄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붉은 핏발이 가득한 눈빛과 심줄을 세워 움켜진 주먹으로는 Soft와 Smart가 대세라는 이 21세기에서 쌈박질해 볼 상대조차 찾을 수 없을 게다. 길을 걷다가 돌을 보면, 약자는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디딤돌이라고 한단다. 아옹다옹 하지 말고 알콩달콩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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