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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땀으로 키운 나무

없음

머리는 인공지능, 팔다리는 로봇,

상상조차 빅데이터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오늘날이다.

샘을 파고 우물을 만들어 길어 올려야

물 한 바가지 얻는 것은 불변의 이치이다.

땀 흘리기를 마다하는 디자이너는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과 같다.

이렇듯 쉽게, 짧게, 편히 일하고 많이 놀려는 심보로는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사는 불한당(不汗黨)으로 전락될 것이다.


박인학│발행인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면 천신만고 끝에 오는 감미로운 안락을 말하지만, 혀끝에서 느껴지는 순간의 달달한 맛은 이내 갈증만 부르지 결국은 몸에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대개가 짠맛보다는 단맛을 찾고 소금 등에 포함한 나트륨의 섭취를 제한하는 저염식이 건강에 좋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설탕보다는 소금이 몸을 위해 생리적으로 월등히 필요불가결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유목생활을 하던 원시수렵시대에는 고기를 먹음으로써 그 안에 들어있는 소금 성분을 자연스럽게 섭취했으나, 농경사회로 바뀌며 식생활이 곡류나 채소를 위주로 하게 되자 따로 소금이 필요했다. 또한 소금은 고대국가의 종교의식에서 중요한 제물로도 이용되었고 변하지 않는 소금의 성질 때문에 계약이나 충성의 징표로 사용되는 등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필요성에 의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며 화폐적 가치까지 생겨 로마에서는 군인이나 관리의 봉급을 소금으로 주기도 했다.


땀은 신체의 활력징후를 나타내는 바이탈사인(Vital Sign) 중 주요한 하나인 체온의 조절 역할을 하는 매우 묽은 소금물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간들은 이 귀한 땀을 일을 한 후에 흘리게 되는 노폐물 정도로만 여기기 시작했다. 특히 제2차 산업혁명 이후에 인류가 추구한 것은, 한 마디로 땀을 덜, 아니 아예 안 흘리고 생산과 소득을 증대하는 것이었다. 푸른 작업복을 입고 육체노동을 하는 블루칼라보다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사무직에 종사하는 화이트칼라가 되고자 노력했고, 이제 와서는 손가락만 놀리고 그도 귀찮았는지 입으로만 명령해서 먹고 살거나 심지어는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안구인식으로 하는 게 첨단의 신문명이라 여기고 있다. 공장의 노동자는 물론 농부들마저 로봇을 작동하는 버튼만 누르고, 八十八번 수고를 해야 쌀(米) 한 톨이 생긴다는 농사일도 기계로 대신하는 게 현실이다. ‘땀을 흘려야 기와집을 짓는다’는 속담은 이젠 아마득한 일이 된 오늘날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첫 날은 근로자의 날(May day)이다. 이 근로자의 날은 1886년 5월 1일에 8시간노동제 쟁취 및 유혈탄압을 가한 경찰에 대항하여 투쟁한 노동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1889년 7월에 세계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창립대회에서 결정한 날로 대개의 나라에서는 일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휴(休)란 열심히 일하던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대앉아 안식을 얻은 후 다시 일어나려 채비하며 쉬는 것이지, 밤낮없이 먹고 놀고 자는 것만을 반복하는 자로서는 휴(休)의 짜릿한 가치를 못 느낄 것이다. 물론 정신적 노동도이 어찌 보면 육체적 노동보다 더 긴 휴식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의 휴식으로 행복을 얻는 것은 땀을 흘리며 얻는 육체노동이 더 크다는 것은 분명하다.


디자인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조합되어야만 이루어지는 결실이다. 머리를 굴리고 손만 움직여 얻는 아이디어는 종이 위에 그려지는 기획이나 계획에 불과하고, 종국은 디자이너가 직접 행하든 시공자가 대신하든 실현을 위한 땀을 흘려야 만이 완성되는 작업이다. 즉 약 천억 개에 이른다는 뇌의 신경세포들 사이를 흐르는 피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에서 샘솟는 땀이 없으면, 단 하나의 디자인도 성취할 수 없다. “건축은 끊임없는 투쟁이다.”는 ‘곡선의 여왕(Queen of the curve)’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말만 보아도, 땀범벅이 된 디자이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머리는 남에게 빌릴 수 있어도, 몸은 남에게 빌릴 수는 없다.”는 말이 있듯이, 튼튼한 신체조건이 모든 정신 육체적 노동의 시발이다. 이에 모든 노동자들은 휴식과 단련을 통해 신체적 대비를 해가며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근육을 움직이고 땀을 흘릴 마음가짐이 없다면, 인간의 노동력을 탈취하고 있는 이 세기의 문명이기들은 점차 그 점거의 범위를 정신노동의 시장까지 넓히고 말 것이다. 아니 이미 파고들은 지 제법 된 게 눈앞에 보인다.


“노동은 녹슨 것을 빛내는 것과 같이 나태한 자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의 말이다. 어쩌다 성공을 했다 해도 목 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굵은 땀자국이 없으면 결코 행복하지 못할 테고, 더욱이 하등의 노력도 없이 실패가 닥쳤다면 땀샘 속에 고여 있던 땀은 이내 소리 없는 눈물이 되어 발끝까지 흐르게 될 게다. 그래서 프랑스 계몽주의운동의 선구자였던 볼테르(Voltaire)도 “노동은 세 개의 악, 지루함과 부도덕과 가난을 제거한다.”고 말했나 보다.

일할 ‘노(勞)’ 字에는 ‘火’가 두 개나 머리 위에 얹혀 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한다 해도, 땀이 치솟는 수고가 있어야 인간의 삶은 보람을 느낀다. 더워서 뻘뻘 흘리는 땀과 겁나거나 놀라서 흘리는 식은땀과 애를 쓰거나 힘이 들어 흘리는 진땀 그리고 몸뚱이를 움직여 일을 하며 흘리는 땀은 각각 다 다르다. 노동을 하며 흘리는 땀은 정신 육체적 부활을 위한 수혈이다. “너는 네 이마의 땀으로 너의 빵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톨스토이(Tolstoy)의 말이다. 땀을 되찾자.


매서운 모래폭풍까지 불어대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찾아오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거칠고 메마른 불모지였다. 그 황폐한 땅에 살고 있던 가난한 청년에게 시집을 온 여자는 일주일동안 통곡만 하다 나직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했다. “여기에 꽃을 심으면 안 될까요?” 그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모두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여겼던 이 사막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나무가 살 수 있으면 채소도 살 수 있고, 채소가 살 수 있으면 사람도 살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녀는 매일 나무를 심었다. 그동안 꿈도 없이 어떤 방책도 없이 순응하며 자포자기하고 살던 남편도 그녀와 함께 모래바람과 싸우며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20년간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를 심었고, 그 한 그루들이 모여 숲이 되었다. 중국 마오우쑤(毛烏素)사막을 숲으로 만든 인위쩐(殷玉珍)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 기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막을 피해 돌아가서는 숲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사막에 나무를 심었더니, 그것이 숲으로 가는 길이 됐지요.” 비 한 방울도 귀한 사막이었지만, 그 많은 나무를 키운 것은 인위쩐의 땀방울이었다.


머리는 인공지능, 팔다리는 로봇, 상상조차 빅데이터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오늘날이다. 샘을 파고 우물을 만들어 길어 올려야 물 한 바가지 얻는 것은 불변의 이치이다. 땀 흘리기를 마다하는 디자이너는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과 같다. 이렇듯 쉽게, 짧게, 편히 일하고 많이 놀려는 심보로는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사는 불한당(不汗黨)으로 전락될 것이다. 땀은 서예가의 붓 끝의 먹물이고, 환자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탕약이며, 엄마가 아가에게 물린 젖이다. 노동을 하며 흘리는 땀이야말로 인생의 어제들을 모아 내일을 열어주는 오늘의 생명수이다. 내가 흘린 땀의 양이 성공의 높이와는 다를지 몰라도 행복의 넓이와는 비슷할 게다. 땀은 인생을 썩지 않게 해주는 소금이다. 땀은 인생을 썩지 않게 해주는 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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