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INTERIORS

철학부터 디자인하자

없음

현대 디자인에 없는 게 철학이다.

물론 철학을 등한시하는 오늘날의 디자인을 적시하려는

다소 과도한 발설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피만 중시하는 풍조와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시류만을 추종하는 세태가 만연하다 보니,

결국 개념과 사고의 가치보다는

현상과 형상의 과잉 표출만 남발하는 디자인들이 대세인 것만은 실상이다.


박인학│발행인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자리 잡고 양측의 공격에 노출된 채,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영역이 존재한다. 이 무인지대가 바로 철학이다.” 《서양철학사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를 쓴 영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 수학자였으며 ‘행동하는 양심의 지성인’으로 불린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이 남긴 말이다. 이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은 언뜻 보기엔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그 표제의 함의가 매우 중요하다. 대개의 서양 철학자들은 ‘서양 철학사’란 단어 대신 ‘세계 철학사’ 내지는 그저 ‘철학사’라고 명시함으로써, 서양 중심의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러셀은 1920년 가을부터 1년간 베이징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기도 했고, 《러셀, 북경에 가다 中国问题 The Problem of China》에서 “동양의 지혜를 배우지 않고 멸시한다면 서양 문명은 종말로 치달을 것이다!”라고까지 경고할 만큼, 동양의 거대한 정신세계를 인식하여 ‘서양철학사’라는 제목을 택했다니 소위 ‘친(親)’ 또는 ‘지(知)’ 동양 인사인 것은 분명하다.


“여름밤은 마치 생각의 완성과 같다. The summer night is like a perfection of thought.” 미국의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가 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밤이라 해도 하루 종일 폭염 속에서 살다 보니, 머리마저 익어 어떤 생각도 안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그러나 가을 겨울이 책 읽기에 좋다면, 여름에는 그 책의 단어들을 떠올리며 나만의 생각을 다듬어 철학을 깨우치는 것도 한번쯤 해봄직한 일이다. 원래 철학이라는 게 너무 영민한 상태보다는 약간 아둔해 반쯤 멍할 때가 더 잘 어울리는 일탈의 경지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철학은 지고한 철인들이 쓴 두꺼운 철학책들을 들춘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책을 베고 자거나 쓰잘머리 없는 짓거리를 하든지 길거리로 나서 두리번거리다 문뜩 깨우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자칭 타칭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현대 디자인에 없는 게 철학이다. 물론 철학을 등한시하는 오늘날의 디자인을 적시하려는 다소 과도한 발설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피만 중시하는 풍조와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시류만을 추종하는 세태가 만연하다 보니, 결국 개념과 사고의 가치보다는 현상과 형상의 과잉 표출만 남발하는 디자인들이 대세인 것만은 실상이다. ‘온고지신’이라며 옛 정신의 계승을 운운하지만 기껏해야 형(形)과 색(色) 정도의 모방에 그칠 뿐 그 혼(魂)과 기(氣)는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 같고, 오늘과 내일을 직시하고 관조하여 디자인 철학을 얻으려는 작은 노력조차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철학의 영문인 ‘Philosophy’는 ‘사랑하다(愛)’는 뜻의 접두사인 ‘philo’와 ‘지혜(智)’라는 뜻의 ‘sophia’를 합한 라틴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하나, 동양에서의 철학(哲學)은 ‘지(知)’에 ‘인(仁)’과 ‘덕(德)’까지 더한 ‘현자(賢者)’의 사상을 말한다. 이에 우리가 바라는 철인(哲人)은 명철하나 겸양을 갖춘, 정신적 선지자의 인성과 품격을 지닌 자라야 한다. 철학자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듯한 식견과 인격을 소지해야 진정으로 따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철학은 자의식으로만 가득 찬(滿) 자가 아니라 비울(空) 줄도 알아 아무 것도 없는(無) 듯한 마음으로 모두와 소통할 때에, 비로소 시대와 세인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철인의 자세는 명철의 교만한 과시가 아니고 겸허한 교감이 우선이다.

그러니 철학을 자신의 독자적 주관으로만 가득 채우지 말자. 객관을 담을 수 없는 철학은 결국 고여서 썩는 물처럼 되고 말 것이다. 철학을 영구불변의 진리라 여길지 몰라도, 어찌 보면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나 새의 깃털과 같은 것이다. 언제부터 孔子를 그리 높이 섬겼는지, 志學 열댓 살만 되어도 아는 척하고, 而立 서른 살쯤 되면 혼자 잘났다 하고, 不惑 마흔 살이면 남의 말은 들으려도 않고, 知天命 쉰 살이면 하늘 꼭대기만 바라보다, 耳順 예순 살이나 되어야 철이 드는지 귀를 열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도 사람 나름이지만….


철학은 고사하고 생각도 없이 사는 듯싶은데, 이런저런 규칙, 철칙, 원칙만 남발하며 떠벌인다. 철학은 움직이지 않는 뿌리 깊은 바위가 아니라 흐르는 물과 같은 생명체이다. 죽는 날까지 빈 그릇이 되자. 또 그 어떤 지고한 철학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맹신과 추종은 위험한 행보이다. 아무리 대단한 철학이라 해도 그 원천은 한 사람이고, 그 한 철학자가 살던 시대도, 땅도, 형편도 모두가 다르기에, 그 철학을 오늘의 나와 우리에게 무조건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기에 그 철학이 태동해 만세에 남게 된 시작부터 끝까지를 넓게 알고 깊이 느껴, 현재에서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는지를 숙고해야만 그 철학은 비로소 가치를 발할 수 있다.


나름 이런저런 생각은 있는데 그 생각들의 밑바탕이 되는 자기 철학이 없는 이들이 너무 많다. 아니 시시때때 상황과 조건에 따라 안위와 실익을 챙기는 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인생의 철칙이라 자부하는 이들도 많고, 철학이 있다 해도 행실은 별개의 것으로 여기며 산다. 철학이 실천 없이 學에 빠졌을 때에는 단지 머릿속에 묻혀 있고, 說에 머물렀을 때에는 그저 혀끝에 달려 있고, 道에 이르렀다 해도 기껏해야 마음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다. 실천이 없는 철학은 외식이요, 허세요, 오만이요, 죄악이다. 마치 잔뜩 차려놓은 산해진미 밥상 앞에서 수저를 들지 않는 것, 심지어 밤새 지극정성으로 달인 탕약을 바라만보는 것과 매일반이다.

철학은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철학은, 그 뿌리는 굳건히 지키되 땅 위로 나온 줄기와 잎과 꽃은 바람에 흩날릴 줄도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고착적인 자기 철학은 끊임없는 분당과 투쟁만을 초래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꽃들을 상상해 보자. 아름답기는커녕 아마 섬뜩한 풍경일 것이다. 공감이 없는 철학은 억압이다. 희생이 없는 철학은 독선이다. 사랑이 없는 철학은 가식이다. 철학은 단순히 인식하거나 판단하기 위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내 밖을 보고, 내 밖에서 내 안을 보며, 한 인간의 생명적 의미를 존재적 가치로 만드는 작업이다.


디자인은 이제 어엿한 산업이라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러나 디자인산업은 아직도 구태적인 사업이념과 전근대적인 경영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름의 사업철학도 없이 원시산업의 범주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현대의 디자인산업은 감성만 내세우지 이성이 없고, 기억에만 치중하지 기록이 없고, 유행만 따르지 근본이 없고, 일거리만 산재하지 산업화는 안 된 현실이다. 철학이 없는 디자인은 정신이 없는 육체이고, 초목이 없는 대지이고, 사랑이 없는 연인이다. 점을 찍고 선을 그어 디자인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들을 선별해 마음속에서 형상화하는 과정이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철학의 방식이다. 철학은 죽는 날까지 빛 한 점 없는 땅 속에서 자양분을 빨아들이며 쉬지 않고 꿈틀대는 뿌리 같은 존재이다.

구름이 지나야 비로소 하늘이 보인다. 푸른 하늘은 저 위에 늘 있었다. 분명코 있는데 보이지 않으면, 잃지는 않았을지언정 잊고 사는 것이다. 철학은 디자인을 낳는 생명력의 원천이다. 철학부터 디자인하자.



■ 기사 더보기

MY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