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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IORS

기나긴 환절기

없음

단, 일상을 잊고 방만함을 즐기자.

일단, 열심을 잊고 한가로움을 즐기자.

일단, 경쟁을 잊고 너그러움을 즐기자.

일단, 수고를 잊고 느슨함을 즐기자.

일단, 수익을 잊고 소탈함을 즐기자.

일단 밑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오를 태세를 갖추자는 것이다.

산등성이도 오르고 내리며 굽이굽이 이어졌고

물결도 너울너울 흐르는 것이 이치이고 섭리이니,

현세를 잊고 본연을 즐기자.                                                                                    박인학│발행인




흐르는 시간에는 마디가 없는데 사람들은 토막을 내어 이름들을 붙였다. 초침과 분침 시침을 동그란 시계 위에 꽂아 놓고, 24시간을 하루, 7일을 한 주일, 또 1년을 열두 달로 쪼개고, 그도 모자랐는지 천기에 따라 24개의 날에는 절기를 찍더니, 크게는 춘하추동을 두루뭉술하게 나눠 놓았다.

지난 7월 전 세계 평균기온이 섭씨 16.75도로, 자료를 수집한 1880년 이래 14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단다. 대체 언제까지가 여름인지 언제부터가 가을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아침저녁 나절 부는 바람결을 보니 환절기는 맞는 듯싶다. 일 년을 두고 네 개의 계절이 있다지만, 어찌 보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얼추 반 남짓하고, 그 나머지는 소위 환절기라는 접경의 시간인 것 같다. 환절기마다 감기니 비염 등 온갖 알레르기질환 걱정부터 해야 하고 이 애매모호한 시간들을 춘곤이나 추곤으로 빌빌대고 흐느적거리며 살고 있다.

이 경계를 넘나드는 접점들은 하늘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땅 위에도 그득하다. 평지를 걷다 오르내리는 계단, 일반도로를 달리다 내달려야 하는 고속도로의 진출입구, 비장한 각오로 심호흡을 하며 뛰어드는 대중목욕탕의 온탕과 냉탕, 심지어는 변소를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심경까지, 온종일 이 변화무쌍한 소용돌이 속의 변곡점들이 있다. 하기야 코로 들이쉬고 내쉬는 들숨 날숨 사이의 호흡도 한 번만 어긋나면 생명이 끊어지는 더없이 귀한 경계의 순간이다.

환절기는 이전 것들을 접고 새로운 곳으로 발을 들이는 문지방이다. 물론 이전과 이후가 그리 다르진 않기에 문턱에 걸려 나자빠지는 이는 별로 없겠다 싶지만, 이 미미한 사시사철의 차이도 만만치 않아 그러는지 그 즈음마다 날아오는 부고가 어느 해도 변함없이 여느 때보단 많은 게 사실이다.


환절기는 지난 것을 정리하고 다가올 것을 준비하라 주어진 축복의 틈새이다. 틈이 없는 삶은, 한번 걸터앉지도 못하고 걸어야 하는 행군이고 눈을 감은 채 불면에 괴로워하는 밤과 같으니, 틈새는 시골길 버스정류장의 허름한 벤치요, 피곤에 찌든 오십대 만년과장의 달달한 지하철 쪽잠 같은 존재이다.

어찌 보면 그리 길지만은 않은 이 간극을 어떤 자세로 사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계절의 의미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지난 계절을 위해서는 회고로 시작해서, 정선, 유념과 망각, 그리고 다음 계절을 위해서는 상상으로 시작해서, 계획, 재고와 채비가 필요하다. 즉 이어져야 할 선을 긋기 위한 점들을 찍어보는 기간이다. 이 점을 찍기 위해서는 우선 이제까지 겪어 온 경험인 ‘Know How’가 판단의 토대가 될 것이다. 이제껏 우리는 이 Know How가 세상을 사는 가장 큰 힘이라 여겼다. 그러나 더 중한 것은, ‘Why 왜’, ‘Who 누가’, ‘What 무엇을’, ‘Which 그것들 중 어느 것을’,  ‘Where 어디서’, ‘When 언제’, 할지를 ‘Know’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Know How’들은 너무 많이 공표되어 있는 소위 정보화시대이기에, 좀 더 구체적이고 섬세한 맞춤형 대비가 필요하다.


환절기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봤다. 어쩌면 정리하랴 준비하랴 분주히 사는 게 답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새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나를 만들어야 한다.

일단, 일상을 잊고 방만함을 즐기자. 일단, 열심을 잊고 한가로움을 즐기자. 일단, 경쟁을 잊고 너그러움을 즐기자. 일단, 수고를 잊고 느슨함을 즐기자. 일단, 수익을 잊고 소탈함을 즐기자. 일단 밑바닥으로 내려가 다시 오를 태세를 갖추자는 것이다. 산등성이도 오르고 내리며 굽이굽이 이어졌고 물결도 너울너울 흐르는 것이 이치이고 섭리이니, 현세를 잊고 본연을 즐기자는 것이다.


환절기는 변환이다. 그리고 변환의 미학이 바로 예술이다. ‘도’ 하나의 음만으로 이어가는 노래도 없고, ‘빨강’ 한 가지 색만으로 채워진 그림도 없다. 공간디자인의 맛도 벽 바닥 천장의 융합, 목재 철재 석재의 조화, 그리고 동선을 따라가며 나타나는 전경의 변모 등, 각기의 분절에서 와 닿는 감동이 가장 중요하다. 또 변환의 방식 중에는 유지도 있다. 즉 똑같은 빨강이라 할지라도 부드럽거나 거친 붓질에 의해 달라지고, 같은 ‘도’라는 음도 그 길이의 길고 짧음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낳을 것이다.

계절 자체가 딱 떨어지는 경계가 없으니 사실 환절기란 단어도 무의미하다. 그저 기온이 높고 낮고 또 낮의 길이가 길고 짧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디자인의 목표도 격한 단절이 없이 유려하게 이어지며 미세한 다른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에도 공간에도 아니 인간의 일생도 그저 순차적일 뿐 완전한 끊어짐은 없이 순리적인 운율이 있을 뿐이다. 인생도 끝나는 순간까지 끝은 없다.


오늘날은 긴 환절기 속이다. 이번 주도, 이번 달도, 올해 내내 아니 지난 몇 년 동안도 지루한 환절기 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6년의 초봄에 이창호 9단이 알파고란 인공의 괴기에게 무참히 무너진 후, 우리에게는 격변이란 단어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대혼란의 쓰나미와 토네이도가 일순간에 덮쳐 왔다. 그 첨단의 사회생태적 파고는 ‘복고(Retro)’라는 역행적 발버둥질을 치게 하고 있지만, 그런 감상적 회귀만으로는 밀어닥치는 신문명으로 인한 정신문화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언제 어떻게 끝나려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혁신의 문명이기들이 퍼붓고 있다. 원래 ‘이기(利器)’란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하건만, 그 괴이한 신세기의 창조물들은 우리 인류의 목젖을 짓누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덥고 추운 날씨보다 몇 곱절 무서운 문명의 환절기 속에 갇혀 있다.


대단한 게 있나 했더니, 잠 잘 자고, 물 많이 마시고, 손발 깨끗이 씻고, 햇볕 많이 쬐며, 제철음식 먹는 것이 환절기를 건강하게 보내는 대처법이란다. 그저 괜스레 갈팡질팡하지 말고 그저 물 흐르듯 순탄하게 일상생활을 하란 말인 듯하고, 어찌 보면 평생을 이리 살란 말인가 보다.

하지만 좀 버겁더라도 새 계절을 맞으며 한번쯤 뒤척여 보는 것도 나름의 의미도 있지 않나 싶다. 만일 인간이 정한 춘하추동이란 이 나눔이 없었다면 인생은 그저 ‘세월아 네월아’ 하며 흘러가는 나날들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새’라는 단어가 붙은 시간들이 오기에 고칠 건 고치고 버릴 건 버리며 새날을 맞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변한다고 해서 더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해야 한다.” “변화로 인한 비용보다 변화하지 않고 같은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 더 크다.” “당신의 삶은 기회가 아닌 변화에 의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 “만약 당신의 선택에 의심이 든다면 변화를 선택해라.” “변화해라! 억지로 변해야 할 상황이 오기 전에.” 변화에 대한 명언들이다.

가을은 오고, 겨울도 올 게다. 멋들어진 대칭형 깃털을 가진 타조 같은 새들은 날지 못하지만, 비대칭 깃털을 가진 새들은 바람의 저항에 의한 양력을 얻어 날 수 있는 것이란다. 달리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시대의 환절기에서 스스로 일어나 다시 날아가 보자. 슬슬~ 살살~ 차차~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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